영화

영화 <디어 에반 핸슨 Dear Evan Hansen> 후기

파지 2021. 11. 11. 01:45

*스포일러 포함
11/9 작성

포스터
CGV 시사회에 당첨돼서 일찍 봤다
엽서도 받았다…


1. 넘버
2. 인물들
3. 아쉬운 점
4. 기타 좋았던 점


1. 넘버


- Waving Through A Window
이 곡은 원래부터 좋아했다
근데 이렇게까지 불안정한 상태로 부르는 넘버인 줄은 몰랐고
‘숲에 홀로 떨어졌을 때, 주위엔 아무도 없고…’ 하는 가사가 말 그대로 정말 나무에서 떨어지는 일을 얘기하는 줄도 몰랐음…
다른 곡들도 기대를 많이 했는데 멜로디가 귀에 꽂히는 넘버는 더 없었다

- Sincerely Me
연출이 재밌었다
이미 죽은 코너가 나와서 에반과 제러드가 쓰는 말도 안 될 정도로 아름답고 다정한 가짜 이메일 가사를 그대로 줄줄 읊고,
문장을 고쳐 쓸 때면 수정한 문구로 몇 번이고 다시 말하는 게ㅋㅋ

- For Forever
- You Will Be Found
이들 부분에선 에반이 짠한 마음이 들긴 했어
실제로는 곁에 아무도 없었으먼서, 코너가(누군가가) 와서 챙겨줬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온갖 긍정적인 감정들(혼자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거나, 영원히 이렇게 있고 싶다거나…)을 느꼈다고 얘기하잖아
만약 정말 누구든 와주기만 했으면
그 높은 나무에서 일부러 떨어진 에반도 그 이유만으로 ‘영원히 이대로 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될 정도로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그 한 명이 없어서 결국 그 기쁨까지도 가장하고 있다는 게… 너무 안타까웠지
거짓말이 들킬까봐 조마조마한 마음도 있었지만 이때까지는 그래도
그래… 코너는 이미 갔고 너라도 행복하면 됐다…
이런 마음이 들었다
물론 후에 일 커지며 그럴 수 없게 되긴 했지만… 거짓말을 자꾸 덧붙이게 되는 마음도 이해가 됐어

- The Anonymous Ones
가장 좋았음!!
온통 거짓말이거나 어쩐지 공허하게 느껴지는 넘버들 사이에서
진짜로 와닿았던 유일한 곡

최근에 청년 여성 우울증에 관한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언어화되지 못할 때 고통은 심화된다”는 말이 있었음
어떤 고통이 충분히 분석되지 못할 때,
주류 사회의 관심 밖에 머무를 때 당사자의 부담이 가중된다는 이야기인데
알라나도 바로 이 얘길 하고 있고 이걸 해결하려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네

알라나는 이 넘버에서
각자의 고통을 견뎌내며 살아가는 익명의 존재들the anonymous ones이 있고 그들을 알아달라, 혼자가 아니란 걸 알게 해 달라고 호소하고
코너 프로젝트라는 이름 하에 같은 고통을 지닌 사람들이 경험을 공유하고 위로를 나눌 수 있는 커뮤니티를 형성한다…
익명의 개개인에서 나아가 커뮤니티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더 이상 이름 없는 존재가 아니’게 될 수 있는 거지

힘듦을 가진 사람들이 혼자가 아님을 확인하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 맞다
그리고 잘 견뎌낸다고 해서 힘든 일이 아닌 것도 아니고
이건 정말 다양한 상황에 접목이 가능한 얘기인 것 같다
이를테면 퀴어 커뮤니티의 필요성이라든지
<디어 에반 핸슨> 이 영화부터가 계속해서 ‘다양성’, ‘퀴어’에 관한 문구나 상징을 학교라는 배경 곳곳에 배치하고 있고 알라나 캐릭터는 정신질환을 가진 동시에 퀴어이기도 하니(관련 내용 후술함)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볼 수도 없겠다

알라나는 정말 좋은 캐릭터다…
괜찮지 않고 자기도 그걸 알지만 괜찮은 척을 너무 잘하는 + 사랑이 많고 실행력 있고 책임감 있는 여자애라니… 너무 멋지고 대견해!!
세련되고 힙한 시저 버전보다는 극중 나온 알라나 버전이 좋다
언제나 잘 다듬어진 팝가수 버전보다는 인물의 감정이 실린 쪽이 좋아



2. 인물들


- 조이

에반 핸슨과의 관계(후술함)를 빼고 보면 조이 캐릭터는 정말 좋았다
가족 같지 않던 가족의 죽음에 슬픈 마음이 들지 않는 걸 부정하지 않고 또 거기에 죄책감 갖지 않으려 하는 게
솔직하고 현실적이라 좋아
게다가 이런 감정은 흔히 다뤄지지 않으니까
뻔함으로 가득한 이 영화에서 알라나와 더불어 몇 안 되는 신선한 구석이었다

나는 오히려 조이의 얘기가 궁금해…
위에서 언급한 저런 감정은 넘버 하나만으로 설명하기엔 너무 구체적이고 다층적이라서
아예 얘만의(혹은 얘와 비슷한 상황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다

게다가 조이가 코너에게 당한 일들은 명백히 가정폭력인데
에반과는 관계 없는 일이니까 깊게 다뤄지지 않은 거겠지만
그게 별거 아니었단 듯이… 단순히 삐딱한 조이가 슬퍼하는 엄마에게 반항하려고 하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이
한두 번 대충 언급되고 넘어가버린 것도… 아쉽다


- 에반 엄마(하이디 핸슨)

줄리안무어가 이런 시시하고 뻔한 거 해야 돼?
이런 걸 볼 때면
SNL에서 엠마 스톤이 게이 포르노 엑스트라 여캐로 나왔던 풍자 스킷이 생각난다
중요하지 않은 인물을 맡은 여성 배우가 과분하게 깊고 뛰어난 연기를 펼쳐버리는…
엄마는 에반이 혼자가 아니게 해주는 첫 번째 사람이고
그거야말로 이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이니 물론 엠마 스톤의 저 캐릭터보다야 훨씬 중요하긴 하다
그렇지만 여전히 아쉬운 점은 있어

엄마로서만 존재하는 여성 인물들이 그러하듯이 이름도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자녀가 실망스럽게 굴더라도 사랑을 잃지 않고 무한한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끼고 제 인생 갈아 ‘엄마노릇’ 제대로 해보려고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바쁜 싱글맘에게 기대하는 모성애 그 자체 같다

그럼에도 엄마는 결국 ‘에반의 부족한 점’ 중 하나가 된다 (화목한 ‘정상적’ 가족의 부재)
그렇게 노력해도 하자 그 자체가 돼버리다니 너무 가혹하지 않나??
그렇지만 에반 엄마는 속상해는 하지만 화도 안 내고 자기가 얼마나 아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지만을 다정하게 노래한다…
너무 그린 듯한 ‘부족하지만 애쓰는 엄마’ 같음
물론 이런 인물은 부정할 수 없이 감동적이지
특히나 줄리안무어는 이런 걸 너무 잘한다
보는 사람까지도 그 감정에 몰입하게 하는 게 있다… 그래서 납득은 너무 잘 돼
근데 그래도 정말 이게 다야??? 믿을 수 없어


- 알라나

알라나 캐릭터가 너무 좋아서 에반핸슨이 너무 짜증나
얘는 정말로 그냥 추진력 있고 책임감 있는 애였던 거야
처음엔 코너프로젝트 얘기할 때 약간 오지랖 아냐? 생각하기도 했지만
당사자성 있는 걸 알고는 그런 게 아니구나 얘는 정말 진심이고 대단한 애구나 했다
믿고 후원해준 사람들을 위해서, 에반과 코너의 이야기에 위로받은 사람들을 위해서 펀딩을 채워야 한다고 책임감을 느끼는 모습이 정말로 좋았다

근데 에반핸슨이… 얘에게 끝까지 거짓말을 하고 얘를 실망시키고
얘가 한 모든 선한 행동들까지 욕되게 만들었잖아
정말 화나


- 조이 엄마(신시아 머피)

가장 마음이 쓰인 인물…
억지스럽게나마 좋은 면에 집중해서 애써 이겨내려 하는 게… 너무 짠했다
게다가 에반핸슨이 자기가 거짓말 했다고 밝혔을 때
배신감 좌절감도 느꼈을 거고 화도 났을 텐데
험한 말 없이 애써 웃으려고 노력하면서
가보는 게 좋겠다고 말해주는 거…
그리고 진실을 밝히지 않는 게 좋겠다고 판단하는 거 좋았다

사실 이 부분들은 가정주부 여성에게 가해지는
언성 높이지 말고 쓸데없이 일 키우지 말라는 압박 따위와 관련된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애한테 소리지르고 화내는 것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대처라고 생각해

에이미아담스는 진짜 대단하다
슬픔과 절망을 제쳐두고 어떻게든 좋은 점을 찾아보려고 정신승리 해 보려고 희망을 품고 에반을 보는 표정이 매번 너무 간절해서
마음이 너무 아프고… 눈을 뗄 수가 없음…



3. 아쉬운 점

- 불쾌한 에반과 조이의 관계

이 작품에서 가장 거슬린 부분!!!!!!!!!!!!!!!
에반핸슨은 여자였어야 했다
아니면 최소한 조이와의 관계만큼은 그러지 않았어야 했어

조이가 에반핸슨이 변화함(거짓말함)으로써 ‘얻어지는’ 보상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는 느낌을 결코 지울 수가 없다
처음 에반이 조이를 좋아한다고 나올 때부터
조이를 에반이 ‘갖지 못한 것들’ 중 하나로 보여주는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딱 그게 맞더라고
‘잘나가지 않는’ 남자애가 어떤 계기로 좋아하던 멋진 여자애를 ‘획득’하는 얘기는 세상에 너~무 많고
원래도 싫었고 이제 질리기까지 했는데 2021년에 아직도 그걸 또??
그전까진 재밌게 보고 있었는데 그 순간 맥 풀리고 정말정말 너무 실망했다…
그냥 처음으로 얻어본 진짜 친구 정도면 안 됐던 거야??
조이가 에반과 가까워진다는 게 꼭 연애감정이었어야 했냐고
조이가 ‘네가 좋아’ 하는 순간에는 이마 짚었고
이어서 사랑노래 부를 때는 그냥 나가고 싶었다
그래도 이후에 전말이 밝혀지고 나서는 그때라도 잘 헤어졌더라…

게다가 에반의 어떤 행동들은
남자라서… 좀 그랬다
에반이라는 캐릭터가 만약 중립적으로 ‘사람’이었더라면 꺼림칙하지 않았을 것들이 하필 ‘남자’라서 불쾌한 구석들이 있고
이건 의도된 바가 아니었을 테니 작품의 하자라고 느끼는 것임
에반이 조이의 사소한 점들을 관찰하고 기억하고… 이런 건 단순히 ‘에반이 조이를 좋아했다’만을 보여주려고 들어간 장치였겠지만
현실적인 맥락을 고려하면 결코 그렇게 단순하게만은 볼 수 없잖아??
정상적으로 관심을 표현할 줄 모르는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애를 일방적으로 관찰해서 사소한 면들을 속속들이 꿴다는 게
어떤 면에선 불쾌하지 않을 수 없다
사려깊지 못한 묘사였다고 생각해
이런 서사를 넣을 거라면 조이를 남자애로 바꾸는 한이 있더라도(안바꾸면 좋고) 에반핸슨은 기필코 여자였어야만 했다


- 그외

머피 가족의 선택에도 불구하고 에반이 진실을 공개하는 부분
머피네의 의사도 묻지 않고 코너와의 관계에 관한 진실을 밝혀버리는데
거짓말에 대해 반성하고 있단 걸 보여주려고 한 거겠지만
이것마저도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코너 가족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고 또 자기 멋대로 굴고 있잖아
에반이 나쁜 선택을 할 수는 있는데
영화가 그걸 나쁜 선택이 아닌 것처럼 보여주는 게(그리고 나쁜 선택이 될 수도 있단 건 생각지 않고 만들었겠지) 별로였다
에반한슨이란 인물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그에게 공감하는 데에도 큰 어려움 없지만
이 이야기 바깥의 창작자는 무감각한 점이 많다고 생각해

뮤지컬이 인기작인 건 알았는데 이번에 만들어진 영화 평이 좋지 않대서
영화로 가져오는 과정에서 아쉬운 구석이 생겼나보다 했는데
예상한 거랑 반대로 영화 만듦새는 특별히 나쁠 게 없었고
기존부터 있었을 서사 자체에 실망스러운 점이 많았음... 뮤지컬을 안 봐서 얼마나 각색된 건지를 정확히 모르니 말을 많이 할 수는 없지만

영화의 주제가 되는 메시지를 한계점들보다 더 크게 느낀다면 충분히 좋아할 만한 영화일 것 같고 그럴 사람도 분명 많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일단 그게 나는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백인 남자애 성장서사만큼 더 나올 필요 없는 게 없다
이 이야기가 가진 좋은 점을 제대로 보여주고 싶다면 최소한 주인공이 백인과 남자 둘 중 하나는 아니었어야지
뮤지컬로서 이미 크게 성공한 작품을 영화로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좀 더 실험적이고 공격적인 변화를 줄 수는 없었나?
알라나 캐릭터가 기존보다 확대됐다고는 들었는데 그건 정말 마음에 들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브로드웨이 오리지널 캐스트인 벤 플랫을 그대로 데려오는 걸 강점으로 삼고자 한 것 같은데 글쎄…
오히려 새로운 사람을 발굴하는 편이 나았을 것 같다
백남인 걸 차치하고서도… 고등학생처럼 보이지 않음ㅠ
<피치 퍼펙트>에서도 그랬듯이 쭈굴하고 어색한 연기는 정말 잘해서 혼자 있을 땐 그럭저럭 나이 가늠이 안 되는 느낌이기도 하지만
다른 고등학생 인물들과 함께 있으면 확 느껴진다
특히 조이와 함께 있을 때면 너무 심각하다… (사실은 3살밖에 차이 안 나긴 하지만 디버가 워낙 어려 보이는 탓도 있고)

몰입해서 긴장감 있게 재밌게 보긴 했고
You will be found라는 중심 메시지도 딱 들으면 좋긴 한데… 직접적으로 와닿진 않았다
이 부분은 영화 탓이라기보단 아마 나 개인의 경험이 한정적이고 처지가 다른 탓일 듯
그러나 에반이 백인 남자만 아니었으면 어떻게든 지금보다는 잘 공감할 수 있었을 거야…
알라나가 주인공이고 The Anonymous Ones가 메인 테마인 영화가 나온다면 그건 정말정말 내 일처럼 100% 이입해서 보게 될 텐데 말이야 (이건 진짜로 엄청 보고 싶다)


4. 기타 좋았던 점


- SNS 알림음이 공포감을 주는 연출이 좋았다
같은 알림이라도
상황이 좋을 때에는 성공의 지표이다가
상황이 나빠지면 하나하나가 비난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는 게
소셜 미디어의 가장 크고 잔인한 특성 중 하나가 아니겠어
정말 소름돋음!!

- 케이틀린 디버가 이렇게… 핫할 수 있는 줄 몰랐어
ㅋㅋㅋㅋㅋㅋㅋ
이제 연달아서 북스마트의 에이미를 보면 너무 재밌겠다

- 알라나 캐릭터는 퀴어다!

“그리고 정말로, 제 캐릭터 알라나는 퀴어예요.”라며 작중의 인물들 또한 LGBTQ+ 커뮤니티에 속해 있음을 밝혔다.
“세 시간짜리 뮤지컬을 영화에 담아내다 보니 시간 제약이 있었어서 (관객들은) 알아차리지 못하셨을지 모르지만, 알라나가 퀴어라는 건 제게 정말 중요한 부분이에요. 그리고 그것 또한 알라나의 정체성의 일부라는 걸 이해하시겠죠. 알라나가 혼자라고 느끼는 사람들을 그렇게나 깊이 신경쓰는 건 그 이유 때문이기도 해요. 그러니 이건 확실히 동성애자들을 위한 거라고 볼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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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에서 알라나가 사물함을 열 때 어깨 너머로 무지개 벽보 같은 것들이 뚜렷하게 보인다
그걸 보고 혹시 알라나가 퀴어인가? 해서 찾아봤는데 정말이었음!
시간 제약 너무 아쉽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건 에반의 영화니까 아주 중점적으로 보여주진 못했겠지만 그래도!!ㅜㅜ
(그치만 그나마 다행인 건 ‘이걸 뺐어야 했는데~~’ 하고 생각이 드는 쓸데없는 장면은 없다는 거)

<디어 에반 핸슨>을 전체적으로 아주 좋게 보진 않았고 좋은 점보단 아쉬운 점이 많지만,
알라나 캐릭터만큼은 이 영화에만 있기 아까울 정도로 정말 멋지다
이 영화가 좋게 기억에 남는 구석이 있다면 전부 알라나 몫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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