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영화 <쁘띠 마망 PETITE MAMAN> 후기

파지 2021. 10. 15. 02:10

*스포일러 포함

내가 좋아하는 포스터
감독님 pick 포스터
엘자 파일철과 보딩패스
보딩패스 후면. QR코드는 예고편으로 연결된다


물욕이 많은 나
뭐 준다는 아트하우스 모모의 트윗을 보고 영화관으로 달려갔다.
요새 보고 싶은 게 정말 단 한 개도 없다 보니 영화관에 가고 싶어도 못 가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가니 정말 좋았다.
아트하우스 모모도 오랜만이야~
엘자 파일철은 주는 줄 몰랐는데 주시길래 냉큼 받았다.
크게 만들어 놓으니까... 안 찢어지는 플라스틱 포스터 같고 좋아

<쁘띠 마망>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는 상태로 상영관에 들어갔다.
셀린 시아마 작, 여자아이 둘이 나오고, 러닝타임이 70분 정도로 짧다는 얘기만 들었었어
제목만 듣고는 쁘띠 마망이라고 불리는 향수 Petits et Mamans 생각을 하고...
혹시 영화도 원제가 Petits et Mamans인데 임의로 간략하게 줄인 건가? 그럼 엄마와 딸 얘기인가? 했는데
아니고 원제도 그냥 딱 Petite Maman 그대로더라고
무슨 뜻일까... 했는데 정말로 '작은(버전의) 엄마'일 줄이야!!ㅜㅜ (따지고 보면 결국은 엄마와 딸의 이야기도 맞긴 하다)
여기저기서 많이 쓰이는 Petite Maman이라는 구를 가져다가 정말로 말 그대로 '조그만 엄마'의 이야기를 하는 셀린 시아마는 정말로 시네마 예수가 맞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이제까지 셀린 시아마의 영화를 여럿 보았는데, 사실 완전히 한 번에 이해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건 한 개도 없고...
대부분이 '뭐가 좋다고 설명은 잘 못하겠지만 아무튼 좋은 영화인 것 같아' 정도의 감상이었는데
<쁘띠 마망>은 보는 내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하는 생각이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에 정리돼서 떠올랐다. 정말 신기하지...


마리옹이 엄마의 어릴적 모습인 게 드러나기 전까지도 이런저런 생각을 했는데
저 사실이 드러남과 동시에 의아하던 모든 점이 짜맞춘 듯 연결되어서 깜짝 놀랐다.
힌트가 워낙 많았어서 밝혀지기 전에 자기가 먼저 알아챈 사람도 충분히 있을 것 같은데, 나는 뭐든 예상하면서 보는 편은 아니라서 순순히 놀랐지 뭐야
아래는 영화에서 앞서부터 드러나던 연관성들.

이름
보딩패스 뒷면을 보고 두 아이 중 하나의 이름이 '마리옹'인 걸 알고 있었는데,
친구 마리옹이 등장하기 전 영화 도입부에서 엄마의 이름이 마리옹이라고 나오는 걸 듣고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은 했다.
그렇지만 둘이 정말로 동일인물이라는 비현실적인 소재를 썼을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해서,
넬리가 마리옹에게 "나는 네 자식이야. 네가 내 엄마야." 했을 때도 '이름이 같다는 뜻인가...?' 하고 넬리의 말의 있는 그대로의 의미를 잠깐 부정했었다. ㅋㅋㅋ

생김새
마리옹과 넬리가 정말 닮았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그냥... 스타일링에 특별한 차이가 없는 백인 여자아이니까 둘의 생김새의 차이를 내가 못 알아볼 뿐이겠지 했는데
아무리 봐도 너무너무 닮은 거야
당연하지 엄마랑 딸인데......
(어릴 땐 밝았던 머리색이 어두워지는 경우가 꽤 있는 것 같긴 하더라~ 하는 생각도 했다.
소설 <핑거 스미스>의 '수'도 어릴 땐 밝은 금발이었다가 자라며 갈색이 되었다는 묘사가 있었던 게 생각나고)
(실제로 두 배우가 일란성 쌍둥이라고! 닮은 게 아니라 똑같이 생긴 거였다.)


집 구조가 동일하더라고
넬리가 화장실에 간 척하고 마리옹 집을 몰래 둘러볼 때 보인 마리옹 집의 복도가 후에 넬리 할머니 집에서도 동일하게 나왔고,
마리옹 엄마가 누워 있던 침실도 넬리 할머니 댁에 똑같이 있고.
근데 이걸 알아채고도
구조가 같은 걸 보니... 단독주택 단지인가? 이런 생각이나 했었다. ㅋㅋㅋㅋ
그리고 또
넬리가 마리옹의 집에 있음 - 넬리를 클로즈업 - 줌아웃하자 넬리가 자기 집에 있음이 드러남
이런 식으로 넬리가 마리옹 집 - 넬리 할머니 집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하는 연출이 몇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배경이 너무 연속적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동일한 벽지 무늬... 이런 것들로 인해)
당연하지 같은 집이니까!

할머니
마리옹의 엄마가 지팡이를 짚고 나왔을 때
영화 도입부에서 넬리가 지팡이 가져도 되냐고 엄마에게 묻던 것이 생각났다. 정말 같은 지팡이일 줄이야
그리고 넬리가 할머니와 함께 하던 십자말풀이인지 스크래블인지 단어 맞추기 게임도 마리옹 엄마가 똑같이 하시길래 마음으로 엉엉 울었어...... 이제는 만날 수 없는 할머니를 다시 만나 평소에 같이 하던 일을 한 거잖아… 이건 너무 큰 선물이야 넬리에게……
나는 할머니 얘기가 나오면 무조건 속절없이 감동을 받고 만다…


그리고 이제 특별히 좋았던 점들

과자 먹는 넬리
처음에 넬리가 엄마 차를 타고 가면서 간식 먹을 때
굳이 막대 모양 과자를 입안으로 갈아넣듯이 앞니로 갉갉갉갉. 하고 먹는 게 정말 실제로 어린아이가 할 법한 행동 같아서 좋았다. 나도 그랬었고. ㅋㅋㅋ

과자 - 과자 - 과자 - 음료 - 포옹
운전석에 앉은 엄마에게 손 뻗어서 과자를 먹여주는 게 정말 너무너무 사랑스러워서 줄줄 울었다...
이건 진짜 울었음 영화 시작 오 분도 안 돼서 눈물 쓱쓱 닦음
엄마한테 과자 내미는 것 보고는 ㅎㅎ귀엽네 하다가
하나 더 먹여주는 것 보고 '우리 엄만 맨날 이쯤에서 거절했었는데...' 내 기억 떠올리고 (ㅋㅋㅋ)
세 번째 먹여줄 땐 '엄마가 잘 먹으니까 좋아하는구나 싶어서 계속 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정말 귀엽다고 생각했다.
근데 음료수까지 야무지게 내미는 것 보고 갑자기 눈물 차오르는 거야......... 너무 사려깊고 사랑스러워서.........
(엄마가 거절 안 하고 운전 중에 불편한데도 음료까지 마셔주는 것도 정말 좋았다. 사실 과자도 음료수도 그다지 먹고 싶진 않았을 것 같은데...ㅋㅋㅜ)
마지막으로 팔 뻗어서 꼭 안아주는 것까지 보고 정말 마음이 너무너무 따수워졌어... 눈에서 땀나더라...
이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이 처음부터 나와버린 거야

친구 마리옹 = 엄마 마리옹
이 사실이 드러난 이후로
친구 마리옹의 속성이 곧 엄마의 것이고
엄마의 어릴 때 추억은 친구 마리옹의 현재라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묘했었다.
친구 마리옹이 코코아 뭉쳐 먹기를 좋아한다는 건 엄마는 어릴 때 코코아 뭉쳐 먹기를 좋아했다는 거고
친구 마리옹이 배우가 되고 싶다는 건 엄마의 어릴적 꿈이 배우였다는 거고
엄마의 어릴적 일기를 보니 철자가 틀린 구석이 많았다는 건 친구 마리옹은 지금 철자에 약하다는 뜻
이런 식으로...

엄마의 '진짜 어릴적 얘기'
어른들은 어릴적에 대한 '진짜 얘기'는 안 해준다고 넬리가 투덜대는 장면이 있었는데
넬리가 어린 마리옹과 친구가 되어서 서로를 알아가고 함께 이것저것 하는 것 자체가
엄마의 '진짜 어린 시절 얘기'를 더할 나위 없이 제대로 듣는 일이잖아
그 점이 정말 좋았다...

내일로 순간이동
내일이 너무 기다려진다는 말에 아빠가 "그럼 내일로 순간이동 해볼까?" 하고 불을 탁 끄는데
그와 동시에 화면이 전환되어 정말로 내일로 순간이동한다.
ㅜㅜㅜㅜㅜㅜㅜㅜ너무 좋아 천재 연출!!!!!!
잠에 드는 것을 '내일로 순간이동'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정말 좋다.
잠드는 순간부터 깨어날 때까지는 (꿈을 제외하고는) 기억도 의식도 없고, 눈을 뜨면 말 그대로 (느낌상) 순식간에 몇 시간이 지난 시점으로 가 있을 뿐이니까 순간이동이 맞지!
오늘부터 나도 잘 때 내일로 순간이동 한다고 생각하려고...

할머니와 마지막 인사
할머니와 마지막으로 인사했을 때
그때가 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며 단순히 "Au revoir" 하고 평범하게 인사한 게 아쉽다고 넬리는 말했었다.
그렇지만 마리옹이 차를 타고 떠나는 날 마리옹의 엄마(=할머니)와 인사할 때에도 넬리는 또다시 그대로 "Au revoir" 하고 인사한다.
이번에는 이게 마지막일 걸 알았을 텐데도...
지난번보다 더 좋은 말을 찾지 못한 걸까?
아니면 결국 지난번에 했던 단순한 인삿말이 가장 좋은 작별인사라는 걸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다.
같은 인삿말을 다시 선택함으로써 넬리가 할머니와의 지난번 마지막을 후회하지 않게 됐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아서 이 장면이 마음에 들었다.

생일 축하
아빠가 '엄마 생일이니 빨리 가서 축하해주자'며 일찍 떠나자 했을 때
넬리는 남아서 친구 마리옹의 생일을 축하해주길 택한다.
엄마 생일 축하를 아빠보다는 할머니와 함께하길 택했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드네
돌아가신 할머니는 이제 마리옹의 생일을 축하해줄 수 없는데,
친구 마리옹의 생일 축하는 할머니와 함께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케이크를 돌려가며 초에 불 붙이는 부분도 좋았다.
이 부분은 의도가 아닐 것 같기도 하지만, 넬리가 한 번에 불을 잘 붙이지 못해서 이미 지나간 초에 다시 불을 가져다 대는 순간이 한 번 있다.
미숙하지만 꼼꼼한 게 야무져 보여서 그런지... 괜히 좋더라고
생일 노래 한 번 더 불러달라는 말에 아무도 군말 없이 다시 노래를 시작해주는 점도 좋았다. 따뜻해 ㅜ.ㅜ

아빠에게도 어린 마리옹이 보인다
아빠가 넬리에게 하루 일찍 떠나자 하는 얘기를 하고 있을 때
옆에 빠져 있던 어린 마리옹이 그들 앞에 나타나는데
나는 사실 아빠가 마리옹을 못 볼지도(어린 마리옹의 존재 자체가 넬리의 상상이라든지 아무튼 마리옹이 넬리에게만 보이는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더라고
아빠한테 안 보이는 쪽보다 보이는 쪽이 더 좋은 것 같아
덕분에 마리옹과의 기억, 있었던 일들 등등 모든 게 넬리만의 허상이 아니라 진짜라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어린 마리옹이 그 시점에 실재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데, 엄마의 어린 시절을 만나 친구가 된다는 말 안 되는 일이 넬리에겐 실제라는 그 점이 좋다. 그 비현실적인 느낌이…

너 때문은 아닐 거야
엄마가 왜 떠났는지에 대해 얘기할 때였나? 친구 마리옹이 넬리에게 (어찌 됐든) 너 때문은 아닐 거라고 말해줬는데
마지막에 넬리가 엄마와 다시 만났을 때
어린 마리옹이 생각한 것과 같이, 엄마 마리옹이 넬리 때문에 떠난 게 아니라는 게(어린 마리옹의 말이 옳았다는 게) 확인되는 듯해서 좋았다...

호수 구조물 아래
배경음악을 쓰지 않는 영화에서 음악이 나오는 순간이면
이 장면이 정말정말 특별하다는 걸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지
그것도 엄청나게 환상적이고 벅차오르는 음악!
영화관에서 보니 이 극단적인 대조가 아주 선명하게 느껴지는 게 좋았다.

<카조니어>의 주유소 화장실 씬이 생각나기도 했다.
빙글빙글 도는 그 어두운 공간이야말로 그들만의 세상인... 그런 느낌이 막연하게 들었다네

엔딩 크레딧
자막 없이 볼 수 있었더라면 시각적으로 훨씬 더 좋았을 것 같더라... 프랑스인들은 무슨 착한 일을 했다고 셀린 시아마 보유국인 건데?? 질투난다
엄청나게 웅장하고 홀리한 노래...
구석에서 아주 작게 아주 빠르게 흘러가는 가사...
가사 내용도 마리옹과 넬리의 이야기 그 자체다. '내 마음 안에 네 마음이 있어, 네 마음 안에 내 마음이 있어...'



영화 보는 중에 곧장 떠오른 생각들도 있고, 글 쓰면서 새로 떠오른 부분도 많다.
내가 본 셀린 시아마 영화 중에 <쁘띠 마망>이 가장 마음에 든다...
아직 다른 사람들의 감상 같은 것은 전혀 보지 않은 상태인데
남들 생각도 궁금하고 내가 느끼지 못한 점이 또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내가 직접 다시 보면 또 새로운 감상이 추가되겠지
간만에 줄글로 후기 쓰고 싶은 영화를 봐서 즐거웠다~